2007년 01월 25일
<그냥 산이 좋으니까> 02. 의외로 덜 힘들었던 오르막길.

__지리산을 3박4일로 네 등분했을 때 나는 가장 힘든 날을 첫 날로 꼽는다. 순서대로 쓰면 제1일-제4일-제2일-제3일 이렇게 될까. 첫 날은 내리막길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오르막길이 4-5시간 지속된다. 그것도 가면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기 때문에 반을 올라왔다고 하여도 남은 반이 지금까지 올라온 반과 같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처음 같이 가는 사람들과는 되도록 무리를 시키지 않으려고 평균 4시간 코스인 화엄사-노고단을 일일째의 여정으로 잡는데 이것을 사람들한테 얘기하면 '애개~??' 하면서 쓴 웃음을 짓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지리산에 오는 교통편만 잘 잡힌다면 나와 같은 초보자에게는 정말 워밍업으로써는 최고의 거리라고 생각한다. 서울에서 지리산에 오는 기차는 첫차가 지리산에 오전11시, 막차가 새벽 3시경에 도착하는데 첫차를 타면 노고단 숙소에 해질무렵에 도착하게 되어 여유롭지 못한데다가 시간을 끌 경우 야간산행처럼 되어버려 위험해지기 때문에 숙련자가 아닌 이상 첫차를 타고 가는 것이 좋다. 그런데 또 첫차를 타고 새벽에 도착하면 해가 안 떠서 해가 뜨기까지 덜덜 떨면서 기다려야 한다.
__나와 백곰형은 서울에서 오기 때문에 3시반에 구례구역에 도착하는데 팽곰형은 첫차가 아침7시에 도착하기 때문에 구례구역에서 3시간 반을 기다리게 되었다. 다행히도 구례구역 안에는 에어콘 같이 생긴 커다란 온풍기가 마련되어 있어 작년처럼 얼어죽지 않기 위해 침낭을 뒤집어 쓰고 남자들끼리 딱 달라붙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서울에서 구례구역까지 오는 시간과 거의 맞먹는 긴 시간을 다시 한 번 기다리는 그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작년까지는 역에 놓여있는 의자가 손잡이가 없이 벤치처럼 이어져있던 것이었는데 노숙자 때문인지 전부 손잡이가 달린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손잡이란 것이 틀만 있고 가운데가 구멍이 뚫려져 있는 것이라 몸을 요리조리 비집어 넣으면 딱 맞게 누울 수가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조금이나마 편하게 잘 수 있었다. 같이 아침을 기다리신 아저씨, 아주머니도 계셨는데 역시 체면이 있으신 듯 부럽다고는 하시면서도 못 누우셨다.
__아침이 다가오면서 기온이 확 떨어져 온풍기가 있는데도 몸이 시리게 되었다. 팽곰형이 올 시간이 가까워져서 춥다고 빨리오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기차 안은 덥다고 답장이 왔다.
__이윽고 팽곰형은 도착, 주황색 모자를 쓰고 멀리서 척척 걸어오는 영원 등산복 풀세트의 모습은 누가봐도 5년 숙성의 베테랑 산악인이었다.
__첫 차 시간에 맞춰 문을 연 식당에서 밥을 먹고 짐을 고르게 분배, 역 앞에서 출발 사진을 찍고 화엄사행 택시를 탔다. 택시값을 대충 만원정도 준 것 같은데 하면서 만원에 가시냐고 기사님께 여쭤보니 너무나 흔쾌히 승낙하셔서 엑, 더 싸게 갔었나? 했었는데 집에와서 확인해 보니 작년에는 만삼천원이었다. 아싸~ 하고 싶은 마음도 잠시, 이번에는 해가 떠서 갔기 때문에 입장료를 지불해야했다. 국립공원입장료가 없어진 대신 문화재입장료가 생겨서 화엄사입장료를 내야했는데 왠지 아까웠다. 화엄사는 가지도 않는데...

__아침에 뻗뻗하게 굳은 몸을 준비운동으로 풀고 이윽고 지리산에 첫 발을 내밀었다.
__백걸음도 채 못걸어 신발에 흙도 제대로 묻지 않은 때에 어디선가 '다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음? 뭐지?' 하고 그냥 걸었는데 계속 반복적으로 들리는 '다다닥~다다닥~다다다다다~' 하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조용히 멈춰있는 나무숲에서 소리를 내며 움직임을 보이는 한 곳이 순간 눈에 포착되었다. 아, 딱따구리다. 소문은 들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몸은 안 움직이고 목부터 머리만 일직선으로 두두두 움직이는게 웃찾사의 화산고가 생각났다. 딱따구리 권법은 없었던가? 생각해보니 내가 어렸을 적부터 속해 있었던 보이스카우트 팀명도 딱따구리였는데. 왠지 좋은 느낌이었다. 앞에 가는 두 형들을 불러서 딱따구리 보러 오라고 20m정도 뒤에서 불렀는데 '응? 안 봐도 되는데~뒤로 갔다 다시 앞으로 오기 힘들어.'하면서도 보러 오셨다.
__두 형들은 '포기 유머 능력'이 탁월하다. 적절한 타이밍에 한 번 씩 쏴주는 포기와 체념이 가득 담긴 개그, 본인들은 진담이었다고 하지만 - 나도 하도 많이 들었던 탓에 진담으로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생겼었지만 - 이번 지리산여행으로 인해 본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어쨋든 적재적소에 허무하게 터져나오는 그 유머에 이번 여행은 시종일관 실실 웃으면서 재미있게 다녔다.
__짧은 예 : 구례구역 도착한 순간 백곰형 한 마디 "이제 서울갈까? "
-아, 이건 내가 했나? 아무튼 이런 식
__0도 전후의 추운 날씨였지만 산을 점점 올라가면서 우리들은 한꺼풀 한꺼풀씩 옷을 벗어던졌다. 가다가, 쉬다가, 1년에 한 번 지리산 갈 때에만 사먹는 사탕 '사랑방 선물' 과 팽곰형의 원기회복제 '드림 카카오' 를 체내에 투입하여 재충전하기를 반복하며 꾸준히 걸었다. 초반에는 이런저런 화제들로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점점 힘들어지면서 중반에 이르러 얘깃거리를 생각해내기 힘들어지면서 세글자 동물이름대기, 나라이름대기 같은 단순한 대화로 변해갔고 종반에서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__노고단산장이 4-5시에 열기 때문에 일찍 올라가면 난방이 없는 곳에서 벌벌 떨어야해서 점심을 좀 늦게 먹더라도 천천히 천천히 여유롭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작년에는 유럽 자전거여행을 가는 친구를 훈련시키기 위해 짐도 무겁게 하고 정말 한 시간에 한 번 쉬는 페이스로 쉬지않고 올라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한테 정말 못할 짓을 시킨 것 같다. (참고로 그 친구는 휴학을 하고 무사히 유럽자전거여행을 다녀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일 뒤에서 그냥 천천히 걸어가기로 맘을 먹었다. 이번 여행에 유루유루(일어로 '여유롭게')라는 부제를 붙인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였다.
__산에서 믿어서는 안 되는 말 중 1위의 자리를 확고부동하게 지키는 문장이 있으니 바로 '조금만 더 가면 되요.'이다. 흔히 물어보는 '얼마나 남았어요?'에 대해 되돌아오는 말로서 속세에서의 그 말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으니 속세에서의 '조금'은 정말 '조금'에 가까우나 산에서의 '조금'은 짧게는 10분부터 길게는 하루이틀도 간다. 처음 지리산에 왔을 때가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꼭대기가 이제나 저제나 하고 헉헉거리고 가면서 내려오면서 만나는 분들께 한 번도 빠짐없이 '얼마나 남았어요?'를 연발했었다. 그에 대해 자상하게 돌아오는 목소리는 언제나 '조금만 더 가면 되, 힘내라~'였다. 10분을 더 가서 물어보아도, 30분을 더 가서 물어보아도 한 시간, 두 시간을 더가서 물어보아도 똑같이 돌아오는 그 소리에 결국에는 나도 같이 갔던 내 친구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끝이 없는 미로에 들어온 것 같은 공포마저 느꼈었다. 조금 남았다고 '거짓말' 을 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그저 영원히 조금 남은 그곳에 대한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리에서 느껴지는 무서움은 정말 무서운 것이었다. 특히 여름산행 중이라 땀이 많이나서 예상보다 물이 빨리 바닥이 나서 식수보급이 절실한 상황에서 되돌아오는 '조금만 더 가면되요'는 절망적이었다.
이 얘기를 형들에게 하고 나서 조금 걷다가 팽곰형이 물어보았다.
"노고단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어?"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조금만 되요."
하고.
__노고단은 2시경에 도착했는데 '작년에 비해서' 훨씬 힘이 덜들었다. 정말 헉헉 거리면서 죽을힘을 다해 올라왔었는데. 설마 내가 1년동안 체력이 좋아졌다는 것인가? 그건 절대 아닌 것 같고 아마 작년에는 훈련의 느낌이 강했던 반면 올해는 형들과 슬슬 올라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형들의 흥미로운 담화도 피로를 덜어주는 데 한 몫 했을 것 또한 한 이유일 것이다.
___산장이 문을 늦게 열기 때문에 되도록 밥을 천천히 먹어 시간을 끌려했는데 다들 배가 고파있어서 밥을 하자마자 후다닥 먹어버렸다. 팽곰형말로는 1시간은 끌 예정이었던게 30분도 못 갔다고 했다. 이번에 산 휘발유버너도 한 몫을 해서 강력한 화력으로 밥을 순식간에 해버렸다. 결국 밥을 다 먹고는 취사장, 화장실 등 온갖 곳을 뒤지며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곳을 찾아돌아다니게 되었다. 텅 빈 취사장 구석에 달린 입김만큼도 따뜻한 바람이 안 나오는 히터앞에 세 명이 딱 달라붙어 나란히 앉아 오돌오돌 떨던 모습을 회상하면 난방시설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된다. 계속된 연구 끝에 발견된 가장 따뜻한 방법은 취사장 문을 30센티 정도 열어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 들어오는 햇빛에 몸을 쬐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한 사람만이 가능하고 밖에서 볼 경우 매우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단점에 의해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 하였다. 결국 덜덜 떨면서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겨 산장이 열기까지 기다렸고 감기가 걸렸다는 핑계를 삼아 저녁에 배급한다는 담요까지 억지로 받아내어 4시에 이른 잠에 깊이깊이 빠져들었다.

# by | 2007/01/25 23:41 | 트랙백 | 덧글(0)






